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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책을 펼쳐보는 게 아니었는데.

 

히카루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학교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아치형 창문들이 한쪽 벽에 나란히 줄지어져 있는 복도 위론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이 히카루의 거친 발걸음에 채여 데구르르 굴러갔다. 그리고 히카루의 기분이 늘어진 검은 그림자마냥 축축 처지게 만드는 장본인은 연신 재잘대며 소년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히카루! 오늘은 저와 함께 마법진을 그려준다 약속했잖아요?]

"아아, 그래서 내가 오늘 도서관에도 같이 사주고 마법진도 그려줬잖아?"

[그건 히카루의 숙제였잖아요? 완전 기초 중의 기초! 히카루우. 우리 같이 연구해요, 네?]

 

 

저를 '사이'라 이름을 밝힌 청년은 한껏 애처로운 눈을 하며 조르르 뛰어와 저와 마법 공부를 하자고 달려들었지만 히카루는 슬쩍 몸을 비켜 세웠다. 사실 비켜설 필요도 없었지만. 히카루는 슬쩍 시선을 내려 차가운 대리석 복도 바닥에 서있는 사이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저물어가는 붉은 빛이 물든 하얀 로브 사이로 얼핏 드러난 검은 정장 구두 아래엔 모든 존재가 당연히 가지고 있을 그림자라는 것이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사이는 제 의식에 공존하고 있는 유령이니까. 그것도 지독할 정도로 마법에 목매다는 유령. 공부라면, 특히 마법에 대한 공부라면 진절머리를 치는 제게 있어 매번 곁에서 같이 연구하자고 혹은 도서관에 데려달라고 징징대는 사이의 존재는 무척이나 지쳤다. 그나마 오늘은 숙제가 있어 도서관에 가 사이가 원하는 책을 꺼내 그가 읽을 수 있게끔 책장을 넘겨줘서 덜하지만.

 

내가 왜 그 책을 꺼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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